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1)

199978,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편집자 주.

탈북민 여성, 본인 요청으로 이름과 대한민국 도착 시기 미기재

제 하나원 경험은 끔찍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간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중국에 사는 친척들이 저의 탈북을 도와주었고, 그들 중 한 명이 돈을 지불해서 중국인 신분증을 얻어주었습니다. 저는 중국인들과 함께 살고 일을 하면서 제법 괜찮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계속 가식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신분증으로도 중국 내에서 이동하거나 일을 하고, 학교에 다니고, 병원에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민 당국을 상대하거나 여행을 갔다가 돌아올 때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어렵지 않게 신분증을 얻어온 분들은 쉽게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저는 어떠한 걱정도 없이 합법적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신분증이 몹시 가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이민국 수용소 생활은 제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민국 수용소 내 탈북민들은 집단을 이루어서 새로 들어온 탈북민을 고립시키고 있었습니다. 태국 간수들은 탈북민 수감자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으면서 여전히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다른 탈북민들은 제가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같은 공간에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하나원에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자유로부터 매우 가까워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하게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그것은 곧 새로운 경쟁과 갈등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과거의 갈등도 물론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하나원 활동에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만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종교행사도 빠졌습니다. 방에 틀어박힌 채 읽을 수 있는 책은 다 읽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참 끔찍한 시간이었고, 정말 끔찍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탈북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이민국 수용소와 하나원에서 겪게 될 시련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를 더욱 단련시켰을 것입니다.

하나원에서 나온 후 북한과 탈북민과 관련된 것은 모두 피했습니다. 영어가 필요해서 TNKR에 들어왔지만, 그 외엔 북한과 관련된 어떠한 단체와도 연고가 없으며 한국 내 탈북민 친구도 없습니다. 여전히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지만, 제가 익사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저는 사업을 하고 있고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사업과 여행인데요, 둘 다 높은 영어 실력을 요구합니다. 저는 전 세계 사람들과 사업을 하고 있고, 맘껏 여행을 다닐 수 있어 매우 자유롭습니다.  

저는 이제 가짜 신분증을 만들거나 불법체류자로 신고받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감사하고 있지만, 한국에 처음 온 탈북민들에게 하나원과 정착과정은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것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경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원 적응과정에 대비하기 위한 별도의 적응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종겸, 남성, 2012년 탈북, 2013년 한국 도착

하나원에서 나온 지 벌써 100년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주로 생각나는 것은 먹는 것과 자는 것입니다. 하나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가기만 기다렸습니다. 줄곧 생각했습니다. “언제 나갈 수 있을까?”

하나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에 대해 배웠는데, 정말 지루했습니다. 행실이 바르고 근면하면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도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원에서 나가고 싶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해 들어 보기는 했어도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북한에는 무엇인가를 강제로 믿어야 했기에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를 스스로 선택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하나원에는 세 개의 종교단체가 방문해서 저희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불교 단체의 경우 맛있는 음식(특히 제가 좋아하는 과일들)과 좋은 선물을 많이 가지고 왔던 게 기억납니다.

기독교 단체에는 예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예배는 매우 지루했지만, 예쁜 여성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자들만 있는 하나원 건물에서 생활했기에 당연히 남자들만 있는 생활에 큰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매주 우리는 예쁜 여성을 볼 수 있는 일요일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천주교 단체는 피하거나 맨 마지막에 갔습니다. 만나면 함께 찬송가만 불렀거든요. 저를 포함한 하나원의 남자들은 하나의 패턴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기독교 단체에 가서 예쁜 여성들을 보고 그다음엔 불교 단체에 가서 맘껏 먹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천주교 단체에도 들려서 노래를 부르며 쉬었습니다.

지금이니까 즐겁게 기억합니다. 실제 사회정착을 위해 배운 것은 몇 가지만 기억합니다. 교육과정이 체계적이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하나원 출소 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원에서 배웠음에도 사회에 나가 다시 배워야 했던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원에서 나와 1년 뒤 든 생각인데요, 탈북민들이 하나원 밖에서 1달간 많은 것을 경험해본 뒤 다시 하나원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면 집중을 더욱 잘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치 우리에게는 이론만 가르치고 사회에 나가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3개월간 자유를 차단한 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한국 사회에 나가서 1개월간 직접 살아보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교육 방법일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 적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의 강한 북한식 억양이 문제였습니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와 장시간 대화를 하면 눈치를 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 1~2분은 한국식 억양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발표하다가 일어난 일이 생각나는데요, 발표하는 도중 제 말투가 한국인에서 북한사람으로 변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1분간은 괜찮았지만, 발표 도중 긴장을 했는지 한국식 억양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는데, 어느 날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의 본래 억양을 사용하고 나의 모습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문제를 삼는다면, 출신을 근거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니 어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났고, 이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 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자 ‘2017년을 빛낸 도전한국인 10 대상수상자입니다. 기사는 TNKR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번역: 권영민 (Translated by: Youngmin Kwon)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6/728_269828.html

North Korean refugees speak out: ‘My Hanawon experience’

On July 8, 1999,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pened the Settlement Support Center for North Korean Refugees, often referred to as “Hanawon.” In the past two decades, more than 32,000 North Korean refugees have made it to South Korea, with almost every refugee passing through Hanawon. In the lead-up to a forum marking its 20th anniversary, TNKR began asking North Korean refugees about their Hanawon experiences. ― ED. 

Female, name and arrival year withheld by request

My Hanawon experience was terrible, one of the worst things to happen to me in my life. 

My family was in a good position in North Korea; we had relatives in China who helped me escape. One of my relatives there paid for me to get a Chinese ID. I was living and working with Chinese people and having a fine life. I didn’t like having a fake life, however, worried about being revealed as being from North Korea. 

My ID was fine for traveling within China, working and going to school or the hospital. I wasn’t confident that my ID would be valid if I tried to get through Chinese immigration or if I returned from a trip. It may not seem important to people who were born in countries where they easily receive an ID, but I wanted to get identification so I could travel legally without concerns. 

I decided to apply for asylum in South Korea. The Thai prison was the beginning of my trouble. Gangs were there, dominating and isolating newcomers. It seemed that the Thai officials encouraged it so they didn’t have to abuse people directly but they could still keep control. 

At some point, I started to get targeted when they realized I was from a nice family. We were all thrown together. It wasn’t really possible to get away from the bullies. It continued on when we got to South Korea, then during Hanawon it got worse. We were close to freedom, but still so tightly controlled.

We were all kept together as a group, so that meant new rivalries and battles had started, and the previous ones continued. I stopped participating in Hanawon activities and only did the minimum required. I skipped the religious services even though they offered good food. I just stayed in my room, reading every book that was available. 

It was a terrible time in my life, a terrible way to get introduced to South Korea. I don’t regret escaping, but if I had known what I would go through, I would have trained as a fighter to be prepared for the chaos of Thai jail and Hanawon.

After I was released from Hanawon, I avoided everything to do with North Korea or North Korean refugees. I joined TNKR because I needed English, but other than this, I have no connection to North Korea-related organizations, and I don’t have any North Korean refugee friends in South Korea. I still contact family in North Korea but I must be careful because I have been reported as drowning. 

I am doing business and traveling a lot. Those are the two things that I love and I need to sharpen my English for both. I am doing business with people all over the world. I feel so free being able to travel. 

I can travel without worrying about having a fake ID or anyone reporting me as being illegal. I am grateful to South Korea, but my warning is that Hanawon and the transition experience punches North Korean refugees in the face when they first arrive. It seems we need a transition process to get prepared for the Hanawon transition process.

Jong-Kyom, male, escaped in 2012, arrived in 2013

It feels like 100 years ago that I was at Hanawon. I mainly remember eating and sleeping. I wasn’t focused on anything. I was just ready to get out. I kept thinking, “When will I be able to get out?” 

I was so bored, they were teaching about history and Korea. Even when they offered incentives for good behavior and diligence, I wasn’t interested. I just wanted to be released. 

The main thing I remember is religion. I had heard about it but had never experienced it. In North Korea, I was forced to believe things, so it was interesting to meet people who chose different religions by choice. Three religions would visit Hanawon to try to teach us things. I don’t remember their lessons. I do remember the Buddhists brought a lot of nice food, especially my favorite kind of fruit, and nice gifts. 

The Protestants had so many beautiful ladies visiting. The sermons were so boring, but I could look at the beautiful ladies. I was in the all-male Hanawon, so of course it was so boring with us being together so often. We couldn’t wait to see those beautiful ladies every Sunday.

I would avoid the Catholic religious services or visit them last; they just sang together. The other men in Hanawon and I developed a pattern: Let’s go to the Protestants first to see the beautiful ladies, second, let’s eat with the Buddhists. If we had time, we could relax by singing with the Catholics.

It is fun to recall that now. There are just a few things that I remember about the actual things we learned for adjustment. It seems that the process wasn’t well organized. I learned how to open a bank account when I was in Hanawon, but after I got out, I had to re-learn it. 

There were other things that I had been taught that I had to learn once I was free. After I had been out for one year, I had the feeling that if North Korean refugees could live outside of Hanawon for a month, experience many things and then return to Hanawon, that we would pay much closer attention. 

It seemed that what we were being taught was in theory and that there would be people on the outside ready to help us if we had trouble. One month in South Korean society would be the best teacher, better than three months of preparation for people looking at the gates blocking them from freedom.

It took me some time to adjust. One problem is that I had a strong North Korean accent. Even if I never said I was from North Korea, some people could sense it if we talked for long. For a minute or two, I could fake a South Korean accent. I remember when I was making a presentation during one of my university classes. It seemed that as I was presenting that I had transformed from a South Korean to a North Korean man. 

For the first minute, I was fine, but then I got nervous during the presentation, so I guess I forgot to use the South Korean accent. I kept wondering how I could handle this issue, but finally the day came that I decided to forget about it, just be myself and use my own accent. 

If someone had a problem with it, then I didn’t want to associate with them if they would judge me based on where I was from. I didn’t do anything wrong, I was born in North Korea, and now I am in South Korea. 


Casey Lartigue Jr., co-founder of the Teach North Korean Refugees Global Education Center, was the 2017 winner of the “Social Contribution” Prize from the Hansarang Rural Cultural Foundation and the winner of the Global Award from Challenge Korea 2017. TNKR co-founder Eunkoo Lee translated the remarks of refugees from Korean to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