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 케이시 라티그
  • 인터뷰 한영통역: 이은구
  • 블로그 글 영한번역: 앨리스 황
  • (감수: 권영민)

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1)

199978,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편집자 주.

탈북민 여성, 본인 요청으로 이름과 대한민국 도착 시기 미기재

제 하나원 경험은 끔찍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간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중국에 사는 친척들이 저의 탈북을 도와주었고, 그들 중 한 명이 돈을 지불해서 중국인 신분증을 얻어주었습니다. 저는 중국인들과 함께 살고 일을 하면서 제법 괜찮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계속 가식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신분증으로도 중국 내에서 이동하거나 일을 하고, 학교에 다니고, 병원에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민 당국을 상대하거나 여행을 갔다가 돌아올 때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어렵지 않게 신분증을 얻어온 분들은 쉽게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저는 어떠한 걱정도 없이 합법적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신분증이 몹시 가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이민국 수용소 생활은 제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민국 수용소 내 탈북민들은 집단을 이루어서 새로 들어온 탈북민을 고립시키고 있었습니다. 태국 간수들은 탈북민 수감자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으면서 여전히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다른 탈북민들은 제가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같은 공간에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하나원에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자유로부터 매우 가까워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하게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그것은 곧 새로운 경쟁과 갈등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과거의 갈등도 물론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하나원 활동에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만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종교행사도 빠졌습니다. 방에 틀어박힌 채 읽을 수 있는 책은 다 읽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참 끔찍한 시간이었고, 정말 끔찍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탈북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이민국 수용소와 하나원에서 겪게 될 시련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를 더욱 단련시켰을 것입니다.

하나원에서 나온 후 북한과 탈북민과 관련된 것은 모두 피했습니다. 영어가 필요해서 TNKR에 들어왔지만, 그 외엔 북한과 관련된 어떠한 단체와도 연고가 없으며 한국 내 탈북민 친구도 없습니다. 여전히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지만, 제가 익사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저는 사업을 하고 있고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사업과 여행인데요, 둘 다 높은 영어 실력을 요구합니다. 저는 전 세계 사람들과 사업을 하고 있고, 맘껏 여행을 다닐 수 있어 매우 자유롭습니다.  

저는 이제 가짜 신분증을 만들거나 불법체류자로 신고받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감사하고 있지만, 한국에 처음 온 탈북민들에게 하나원과 정착과정은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것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경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원 적응과정에 대비하기 위한 별도의 적응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종겸, 남성, 2012년 탈북, 2013년 한국 도착

하나원에서 나온 지 벌써 100년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주로 생각나는 것은 먹는 것과 자는 것입니다. 하나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가기만 기다렸습니다. 줄곧 생각했습니다. “언제 나갈 수 있을까?”

하나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에 대해 배웠는데, 정말 지루했습니다. 행실이 바르고 근면하면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도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원에서 나가고 싶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해 들어 보기는 했어도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북한에는 무엇인가를 강제로 믿어야 했기에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를 스스로 선택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하나원에는 세 개의 종교단체가 방문해서 저희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불교 단체의 경우 맛있는 음식(특히 제가 좋아하는 과일들)과 좋은 선물을 많이 가지고 왔던 게 기억납니다.

기독교 단체에는 예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예배는 매우 지루했지만, 예쁜 여성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자들만 있는 하나원 건물에서 생활했기에 당연히 남자들만 있는 생활에 큰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매주 우리는 예쁜 여성을 볼 수 있는 일요일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천주교 단체는 피하거나 맨 마지막에 갔습니다. 만나면 함께 찬송가만 불렀거든요. 저를 포함한 하나원의 남자들은 하나의 패턴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기독교 단체에 가서 예쁜 여성들을 보고 그다음엔 불교 단체에 가서 맘껏 먹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천주교 단체에도 들려서 노래를 부르며 쉬었습니다.

지금이니까 즐겁게 기억합니다. 실제 사회정착을 위해 배운 것은 몇 가지만 기억합니다. 교육과정이 체계적이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하나원 출소 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원에서 배웠음에도 사회에 나가 다시 배워야 했던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원에서 나와 1년 뒤 든 생각인데요, 탈북민들이 하나원 밖에서 1달간 많은 것을 경험해본 뒤 다시 하나원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면 집중을 더욱 잘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치 우리에게는 이론만 가르치고 사회에 나가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3개월간 자유를 차단한 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한국 사회에 나가서 1개월간 직접 살아보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교육 방법일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 적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의 강한 북한식 억양이 문제였습니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와 장시간 대화를 하면 눈치를 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 1~2분은 한국식 억양을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발표하다가 일어난 일이 생각나는데요, 발표하는 도중 제 말투가 한국인에서 북한사람으로 변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1분간은 괜찮았지만, 발표 도중 긴장을 했는지 한국식 억양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는데, 어느 날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의 본래 억양을 사용하고 나의 모습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문제를 삼는다면, 출신을 근거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니 어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났고, 이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 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자 ‘2017년을 빛낸 도전한국인 10 대상수상자입니다. 기사는 TNKR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번역: 권영민 (Translated by: Youngmin Kwon)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6/728_269828.html


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2)


19997월 8일,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진행되는 포럼에 앞서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 편집자 주

은서, 여, 2012년에 탈북 해서 2012년에 한국 도착

하나원은 저에게 쓸모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배운 한가지 말도 안 되는 것은 물을 절약하기 위해 변기에 블록을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저희에게 일상생활에서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것들, 예를 들어 고지서 요금을 내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것보다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저희가 하나원을 떠난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왜 그토록 환경에 집착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하루는 이미 한국 사회에 정착한 탈북민이 찾아와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한국에서 적응하는 것에 관한 전반적인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나름 유익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하나원 밖에서 직접 경험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론 같이 들렸습니다. 하나원을 나온 후, 저는 그곳에서 들었던 강연이 아닌 실질적 경험을 통해 스스로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습니다.

민아, 여, 2011년에 탈북 해서 2012년에 한국 도착

저는 하나원에 있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정말로 하나원을 나가고 싶었지만 홀로서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는 탈북민들의 적응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대안학교를 갈지 일반 학교를 갈지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원에서는 저희가 한국의 일반 공립학교에 가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겁을 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하나원 생활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억양이나 외적인 면들을 바꾸면서 한국 사람같이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 그들의 고향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왜 나는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TV 프로그램들이 북한에 관한 이상한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저의 이야기가 그런 것들과 섞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저 내 인생을 살면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나원 과정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익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한가지, 하나원이 가르치는 방법을 바꿔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탈북민들에게 수개월 동안 TV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한국식 어휘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원 강의는 현실적이지 못하고 지루했습니다. 빨리 한국 사회로 나가고 싶어 하는 탈북민이 대부분임에도 그 지루한 강의를 계속 들어야 합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고 최근 ‘제7회 대한민국 도전페스티벌 시상식’에서 2019년도 Challenge Maker(도전선구자)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기사는 TNKR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6/728_270225.html

번역: Alice Hwang (감수: Youngmin Kwon)


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3)


19997월 8일,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7월 7일 진행되는 포럼에 앞서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3부입니다. 1, 2부는 링크를 확인해주십시오. – 편집자 주

지현, 여, 2012년에 탈북 해서 2017년에 한국에 도착

하나원은 너무 좋았습니다. 한국 생활을 시작하게 해준 훌륭한 프로그램이었고,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원에는 북한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있을 때 지루한 적이 없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너무 좋았습니다. 매일 한국에 관해 배우면서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가장 좋았던 경험은 한 한국 가정 집 방문이 허용됐을 때였습니다. 저희는 한국 생활에 관해 배우게 됐습니다. 너무나 즐겁고 잊지못할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TV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모습을 봐왔습니다. 드라마는 북한에서 몇 개 보았고 중국에서 많이 봤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실제로 한국 집에 있고 한국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제가 영화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힘든 시기는 하나원을 나간 뒤 시작되었습니다. 갑자기 혼자가 된 것입니다. 가족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5년 동안 살았었기에 모든 것들이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한가지 하나원에서 가르치지 않았지만 강조했어야 하는 사항은 계약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법이 무시되고 가장 힘을 가진 사람이 분쟁에서 이깁니다. 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출할 때 브로커에게 300만원을 지불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나중에 그 브로커가 전화 몇 통 한 것 외에는 한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200만원만 내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 브로커가 저를 고소했고 저는 패소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한국 법과 계약의 현실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모든 일에 관련되기 전에 미리 공부를 합니다. 이제 저는 매우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검토하고 제가 약속한 것은 항상 지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저는 전반적으로 잘 적응해 왔습니다. 저는 이 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아주 끔찍한 시절을 보냈고, 북한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습니다. 그 힘든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그저 함께 어울리면서 좋은 찬구가 되려고 합니다.

성철, 남, 2004년에 탈북 해서 2004년에 한국에 도착

저의 경우 어머니께서 먼저 탈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시장 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한국에서 돈을 벌어 가족 모두를 구출할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거리에서 살았고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비록 어렸지만 어머니를 찾기 위해 북한에서 탈출해야 했습니다. 제가 탈북하는 동안 저를 돕던 브로커가 어머니의 소재를 찾아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원에 단 일주일만 있었습니다. 하나원에서는 다른 소년들과 싸움했던 것만 기억나고, 그 후 저는 어머니와 재회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제가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야 비로소 저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저는 북한에 관한 것을 피했습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북한에 있든, 중국에 있든, 한국에 있든 그다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북한출신이라는 이유로 비웃음을 당하면서 저의 출신을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은 제가 하나원에 더 있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생각도 하지만, 어머니와 같이 있는 게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마음의 문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며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1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러한 것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희정, 여, 2014년에 탈북 해서 2015년에 한국에 도착

하나원에서는 규율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운데 간첩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도 높은 보안검사 후에 추가 3개월은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수많은 질문에 답을 한 후에도 왜 제가 하나원을 떠나면 안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질문, 또 질문, 하나원에서의 질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저는 이것이 단지 그들의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거짓말하는지 알아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안보의 중요성은 알겠지만, 지나치게 안보나 저희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데에 집중하는 형태는 많은 탈북민들로 하여금 이러한 전환 과정을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태국에서 한 달, 국정원에서 3개월, 하나원에서 3개월, 총 6개월 이상 저희는 잠재적 간첩 취급을 받으면서 센터를 떠날 수 없는 상태로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저는 자유를 위해 탈북했지만 아직 자유는 없었습니다.

하나원에서 나온 후 저는 처음에 정말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친구가 전혀 없었고, 북한 억양이 심해서 사람들이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첫 해에 저는 우울했고 어머니에게 왜 나를 한국으로 데리고 왔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저는 가족의 배경 때문에 북한에서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1년 동안 저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삶은 상대적으로 덜 복잡해 보였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과 서로에게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합니다. 작은 문제에도 화를 너무 많이 냅니다. 만약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하나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곳 생활은 더 쉬웠으니까요.

지금 사정은 더 좋아졌지만 아직도 우울증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북한의 여러 실상에 관해 저와 인터뷰를 하려고 하는데, 대부분 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 그들은 제가 그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어떤 특정한 것을 이야기하기를 원하는데, 답변에 따라 저를 분류합니다. 제가 통일에 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제가 모든 탈북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양 통일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지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한 명의 사람일 뿐입니다.

정부기관, 언론, 연구원, TV 방송 등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의 저의 모든 인생사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을 때마다 저는 하나원에서의 시간, 그 곳에서의 끊임없는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곳 한국에 와 있고, 한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감사하고 있으며, 한국은 제가 있어 자유의 나라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탈북민들로부터 특정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 필요성과 저희의 사생활 보장의 필요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고 최근 ‘제7회 대한민국 도전페스티벌 시상식’에서 2019년도 Challenge Maker(도전선구자)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기사는 TNKR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6/626_270657.html

번역: Alice Hwang (감수: Youngmin Kwon)


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4)


19997월 8일,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7월 7일 진행되는 포럼에 앞서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4부입니다. 1, 2, 3부는 링크를 확인해주십시오. – 편집자 주

수민, 여, 2008년에 탈북 해서 2009년에 한국에 도착

하나원에 관한 이전 블로그 글들을 읽었습니다. 저의 경험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하나원 시스템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원 과정은 저희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를 접하는 데 있어 매우 해롭고 파괴적인 방식입니다.

저는 마침내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만, 하나원은 저를 지치게 하고 좌절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관심있는 것을 배울 선택의 기회도 없이 세뇌를 당했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모든 것이 세뇌였습니다. 중국에서 만난 목사는 저희가 자유를 찾아 탈출하도록 도움을 주기에 앞서 자신의 종교를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 목사가 얘기하는 것을 100 퍼센트 믿지 않으면 저희를 북한으로 돌려보내거나 더 오래 중국에 묶어 두겠다고 직·간접적으로 위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원에서 또다시 세뇌를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자유로운 곳으로 왔는데도 말입니다.

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나원에 있을 때 컴퓨터 사용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참 이상했습니다. 보안이 주요 관심사란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에서 오래 조사를 했으니 하나원에서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원에서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한국사회와 여러 선택에 관해 배울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원 수료 후 한국에 관한 지식은 조금 생겼지만, 사회 경험이 전무해 3개월 동안 이론적인 강의만 들으며 시간을 낭비한 느낌이었습니다.

국정원에서의 조사는 저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조하는 감옥 같았기에 하나원은 다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감옥과 형무소의 차이였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하나원이 더 나았습니다.

수개월 간의 국정원 조사가 끝난 후 저희는 하나원으로 향하는 큰 버스에 올랐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떨어져 하나원에 있는 탈북민 아동을 위한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학년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쳤고, 저는 이미 청소년이었지만 알파벳과 3학년 산수를 배웠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대략 3년 정도 학교를 다녔었습니다. 하나원의 학교에서 받은 첫번째 숙제는 24개의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알파벳을 몰랐습니다. 경쟁심이 강한 저는 좋은 점수를 받아 상을 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처음 접하는 영어이기에 친구들에게 영어 단어를 한국어 발음으로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영어 발음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하나원에서의 시간이 좋은 공부 습관을 기르게 해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원에서 처음으로 배운 것은 교실에서 자리에 앉는 방법이었습니다. 가르쳐준 대로 의자에 앉는 방법을 연습하던 게 기억납니다.

하나원은 저희에게 한 달에 20,000원을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상점이 있었는데요. 아이스크림을 먹고, 생전 처음 감자칩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만, 봉지에 공기가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속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원 프로그램은 유용하지 않았고, 때로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저희에게는 자유나 선택의 권리가 없었고, 하라는 대로 해야 했으며, 여전히 우리가 간첩이 아닌지 조사와 인터뷰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유, 자유, 자유롭고 싶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던 게 기억납니다. 하나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한국에 왔는데도 교실에서 한국에 관해 배워야하는 게 지긋지긋했습니다. 마치 요리 수업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적응기간의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하나원의 방식은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곧바로 한국 사회로 들어가서 “자유의 나라”를 경험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문밖에 있는 나라에 관해 교실에서 3개월 동안 배웠습니다.

결국에는 서울 시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ATM과 버스카드 사용법을 배웠는데, 은행계좌 개설같은 좀더 수준 높은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생전 처음 한국 드라마에서 본 한강과 63빌딩 같은 것도 보았습니다.

태국에서 저는 이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6개월 이상 지난 상태였습니다. “자유, 자유, 자유롭고 싶은데 언제나 자유로워질까?” 저희는 모두 실망감에 빠졌고, 지루하고 짜증이 나서 잠을 거의 못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배운 것은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를 부르며 제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정말 한국인이 된 것 같고 마침내 한국에서 환대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원 과정은 저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원은 저희가 태국의 한국 대사관에서 한국인을 처음 만나면서 생긴 엄청난 에너지를 고갈시켰습니다. 저희는 북한에서 바깥 세상을 경험할 수 없었는데, 한국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이 힘든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 과정에 우리를 집어넣은 한국을 원망했고 심지어 증오했습니다. 북한이나 중국에는 기대하는 게 없었지만, 한국에는 큰 기대를 하였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좀 더 존중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원의 몇몇 한국 사람들은 저희의 좌절감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원 과정이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프로그램만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질문, 조사, 자유의 박탈, 한국 사회를 경험할 수 없는 상황 등, 이 모든 게 문제였습니다. 강의 내용은 좋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억지로 들어야하는 사람에게는 아니었습니다.

하나원은 몇 가지를 다르게 해야만 했고 그동안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있을 당시 하나원에서 탈북민을 돕는 사람은 전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북한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몇 명이라도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세뇌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말입니다.

제가 원했던 또 한가지의 변화: 한국이 경쟁 사회라며 저희에게 지나치게 겁을 주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원을 떠나기 전부터 제 자신이 패배자라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하나원은 한국 학생들이 아주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쟁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사실상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탈북민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이야기는 탈북민들이 직접 하는 게 맞습니다. 그들의 힘든 상황, 북한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다른 여러 특이한 상황을 함께 나누면서 말이죠.

하나원 사람들은 저희의 기대치를 낮추려고 말한 것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매우 대단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우리가 힘들게 노력해서 자유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중국에서 기다리고, 몽골과 동남아시아에서 기다리고, 국정원에서 기다리고, 하나원에서 기다리고. 모든 지점에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한 한국인 여성이 부른 “나는 꿈이 있어요”를 들었습니다. 그 여가수는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미래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를 탈북민이 성공한 사례로 기억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나원을 떠난 후 저의 우울증은 계속됐습니다. 제가 왜 살아가고 있는지 몰랐고, 왜 탈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으며, 한번 이상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게 냉혹했습니다. 북한 정권, 몽골의 군인들, 중국의 경찰들만큼 냉혹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북한을 회상했습니다: “만약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면 어떨까? 누군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이면 더 좋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저로 하여금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원을 떠난 후,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이 저를 강타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살 때에도 제자신이 작게 느껴졌고 겁이 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저를 의심하는 말투로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서 제가 중국사람인지 조선족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점점 고립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탈북민들이 하나원을 거치지 않고 그곳에서 패배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차별에도 더욱 잘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 국정원에 도착했을 때 저는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수 개월의 기다림, 좌절, 패배감은 저의 자신감과 용기를 앗아갔고, 한국의 그 어떠한 것에도 저는 굴복할 것 같았습니다.

상황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TNKR처럼 저를 도와주고 지도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그 어떠한 때보다도 행복한 마음으로 저에게 주어진 자유를 활용할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나원 과정은 폐기되어야 하고, 정부 관료들은 더 적극적으로 탈북민들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원 과정이 국가안보를 위한 조사의 연장선이라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필요하면 조사 과정을 연장하면 됩니다. 그러나 탈북민의 사회적응 문제에 초점을 맞출 때가 오면, 탈북민들이 진정으로 한국 사회에 대비할 수 있도록 그 문제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고 최근 ‘제7회 대한민국 도전페스티벌 시상식’에서 2019년도 Challenge Maker(도전선구자)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TNKR의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6/728_271053.html

번역: Alice Hwang (감수: Youngmin Kwon)


탈북민에게 듣다: ‘나의 하나원 경험’ (5)


19997월 8일, 한국 정부는 “하나원”이라고 불리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지난 20년간 32,0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였고, 거의 모든 이들이 하나원을 거쳐 갔습니다. 하나원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7월 7일 진행되는 포럼에 앞서 TNKR은 탈북민들로부터 하나원에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5부입니다. 1, 2, 3, 4부는 링크를 확인해주십시오. – 편집자 주

명주, 여, 2009년에 탈북해서 2010년에 한국에 도착

저는 하나원에 있었을 때 정말 밖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지?”라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하나원에 있을 때가 한국에서 가장 편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끔은 하나원에서 지낸 시간이 그립습니다. 비록 지루했지만 평온했고, 덕분에 제 인생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기는 하나원 출소 후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우울증이 생겨 한동안 병원에도 입원했습니다. 저에게는 어떠한 사회적 인맥도 없었기에 정말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제 인생에 있어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향미, 여, 2013년에 탈북해서 2015년에 한국에 도착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에 도착한 후, 저는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갖고 싶었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한 탈북민에게 속아 성 인신매매 피해자로 팔려 간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 도착했다는 실제적인 증거물을 갖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곳을 떠난 후 한 번도 생각 해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음식이 아주 많이 있고, 콩글리시와 한국인들의 생활 등 여러 가지를 배웠던 것은 기억납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을 외워야 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빠리바게뜨(Paris Baguette)”를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 실제로 갔을 때는 제가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원에서 배운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게 놀랍지 않았습니다. 하나원에서 나간 뒤, 하나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을 아주 많이 경험하게 되었으니까요.

하나원을 출소 후 적응 기간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하철은 모두 다르게 설계되어 있어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가끔은 지하철역에 들어왔는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종종 지하철로 연결되는 쇼핑센터였습니다. 집에 돌아가다가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저희 마을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은 참 복잡해서 주소를 알아도 목적지를 찾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자용, 남, 2018년에 탈북해서 2019년에 한국에 도착

한국에서 경험한 것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습니다. 국정원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국정원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따라서 제 주변 상황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에 관한 내용은 당연히 잘 알고 있으니 문제가 없었고요.

일부 탈북민들은 하나원이 지루했다고 하는데, 저는 군인으로서 어렵게 살다가 중국을 통해 탈북한 뒤 휴식을 취하고, 책을 읽고, 한국에서의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하나원 교육과정 중 어떤 게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안 좋은 경험이 있다면, 강사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얼마나 잘났고 돈이 많은지에 대해 자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였습니다. 단체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체 홍보를 하는 것 같았는데요, 아마 저희를 회원으로 모집하려던 것이었겠지요.

저는 1월부터 한국 사회에서 살기 시작해서 한국인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저의 모든 일과는 탈북민을 위한 훈련 및 교육 수업을 듣는 것과 도서관에서의 공부, 그리고 귀가입니다. 저는 한국의 주말 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지금은 저의 미래에 집중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성경, 여, 2005년에 탈북해서 2007년에 한국에 도착

저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았더라면 탈북을 조금 미뤘을 것입니다. 하나원에 도착했을 때 저는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책임지는 어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린아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원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습니다. 저는 하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어 어린 학생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한 탈북민 성인을 따라 전주로 내려갔는데요, 하나원에서 성인들에게 주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원을 나서는 날, 제게는 돈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원의 시스템이 저 같은 젊은 청년에게 좀 더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하나원의 교육 커리큘럼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였고, 미래가 불투명했고, 어떻게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구출해낼지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하나원에 대해 특별히 좋은 기억이나 나쁜 기억이 없습니다. 가족 없이 홀로 이곳에 온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약간 두렵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잘 적응하게 되었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는 북한이탈주민글로벌교육센터(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17년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사회공익부분 특별상 수상자이고 최근 ‘제7회 대한민국 도전페스티벌 시상식’에서 2019년도 Challenge Maker(도전선구자)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TNKR의 이은구 공동대표가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탈북민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http://www.koreatimes.co.kr/www/opinion/2019/07/728_271524.html

번역: Alice Hwang (감수: Youngmin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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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 케이시 라티그
  • 인터뷰 한영통역: 이은구
  • 블로그 글 영한번역: 앨리스 황
  • (감수: 권영민)